본문 바로가기

일상잡기

keine Ahnung

가끔 작업을 하다보면 '의미'의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가 많다. 

'그냥'에서 시작한 작업이 '그냥'으로 끝난다면 결국 의미 없는 사진이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느낌. 

아무래도 교육이라는 일정한 틀 안에서 '사진은 이래야만 한다' 혹은 '이것이 좋은 사진이다'라고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이유 없이'

'모르겠어'


이 세 가지는 작업을 설명하는데 어찌보면 불필요한 단어들일지 모른다. '이성적'인 작업을 요하는 사람 앞에선 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면 이렇다. 학생들은 자신의 주제를 발표하고, 그에 따른 사진을 찍어온다. 교수의 크리틱을 받아 이미지 촬영 방법이나 개념들을 조금씩 수정해나간다. 사진이 모두 모이면 셀렉과 프린팅을 거쳐 최종 발표를 하게 된다. 어찌보면 우리의 작업 방식은 흡사 논문을 써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유 없는 논문이 없듯 우리는 스스로의 작품에 타당성을 부여하곤 한다. 나는 그 방법이 잘 맞았던 사람 중에 하나다. 


하지만 졸업 작품의 주제를 떠올리던 어느 날, 모든게 다 부질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간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다시 한번 주제를 떠올렸지만 이미지와 글은 서로를 겉돌았다. 상기되지 않는 주제. 그럼 내가 무엇을 했던 걸까라고 다시 생각해봤다. 이 사진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난 무엇을 위해 찍었던가. 분명 촬영하는 도중에 느낀 감정들은 생생하나 완성되고 난 이후 날조된 주제들은 세세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사진이 됐다. 


만들어봐야 사라질 의미. 애초에 없애보기로 했던 졸업 전시 작품. 대신 촬영 시 보다 강렬한 감정을 겪고 싶었다. 나 스스로에게 어떤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연락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찾아갔다. 만났고. 촬영했다. 


졸업 작품/논문 주제를 학교에 제출해야 했을 때 해당 주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딱 한 문장을 남겼다. 


"졸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날것의 상황을 날것으로 적어냈다. 회사에 들어가는 이유는 대게 돈을 벌기 위해서고,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저 보고싶어서다. 졸업 작품은 졸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무거울 필요도, 힘겨워할 필요도 없었다. 4년의 결과를 고작 12장의 졸업 사진에서 다 살펴볼 수 있을까. 12년의 교육이 오직 수능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작업하는 것에 있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상흔이다. 3학년 시절 내가 그간 아르바이트한 곳을 모조리 찾아가 촬영한 사진은 밥도 굶고, 차비를 아끼겠다 걸어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밤낮으로 뛰던 시절.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쏟아내며 시작됐다. 졸업 작품 역시 휴대폰의 주소록을 정리하다 생긴 막막함에서 비롯됐다. 그리움, 슬픔, 상처, 아픔. 기쁨과 행복보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 상처는 이미지가 된다. 그저 그것이 전부다. 


분명 나는 책읽기를 사랑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사진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미장센은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유는 담겨있지만 침묵하고 있다. 글은 떠들어대지만 오직 감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냥'이라는 날것을 던져본 적이 없다. 두려웠던가. 아니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가.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물건을 내놓고 가격을 제시하라는 무대뽀 상인처럼 보이는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잠잠한 강의실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가격을 묻는 낯선 손님도, 숨죽인 강의실도, 절대 권력을 지닌 교수도 없다. 이제 날 것을 날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데 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장하준 교수의 말처럼 적절한 걸림돌이, 약간의 제한들이 발전을 앞당기는 것일까.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이 제약이 될 때는 어떤 발전이 있는 것일까. 


'일상잡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늦은 출발  (0) 2015.07.20
진심이 닿다  (0) 2015.07.19
베를린 DHL 파업 후유증  (0) 2015.07.15
unangenehm  (0) 2015.07.12
웹툰) 찌질의 역사  (0) 201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