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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3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두개의 파이프


초판본은 단순한 파이프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새겨진 그림이다. 다른 판본은 파이프를 닮은 형상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 액자에 갇혀 받침대 위에 놓여있고, 그 위에는 경계 없는 허공에 파이프의 형태를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미셀 푸코는 아주 하찮은 애매모호함일 뿐이라 말한다. 하지만 살펴보면 우린 이 세 개를 어떤 정확한 말로도 지칭할 수 없다. 파이프이자 동시에 파이프가 아니며, 파이프라고 말하지 않으면 지시하기가 무척 난감한, 하지만 파이프라고 하기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의 덫에 빠지고 만다.


살펴볼 수록 파이프를 닮은 형상들은 서로 저게 파이프라고 떠밀고, 나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설전하며 부유하거나 멈춰있다. 


일정한 넓이와 높이, 깊이가 있는, 안정감 있는 감옥에 위치한 파이프를 닮은 형상과 좌표 없는 공간에 놓인 파이프를 닮은 형상. 성격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두 이미지 모두 하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미셀 푸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애매모호함마저 확신할 수 없다 말한다. 그에게 가장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위에 위치한 파이프의 위치 불명의 부유성과 아래 파이프의 안정성 사이의 간명한 대립이다.(그는 파이프라고 지칭하고 있다!) 


판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판넬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가 뾰족한 다리 세 개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확신하던 안정감마저 무너진다. 만약 받침대와 액자, 캔버스 혹은 화판, 데셍, 문장 들이 무너저내린다면. 모든 것은 해체될 것이다. 그럼에도 저 위에선 크기도 짐작할 수 없으며, 위치도 알 수 없는 큰 파이프가 영원히 떠있을까. 하고 미셀 푸코는 첫 번째 단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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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책은 얇다. 하지만 읽기는 꽤나 어렵다. 왜일까. 이 책의 느낌은 모두 아는 단어로 이뤄진 영어 문장인데 도저히 해석해낼 수 없는 상황과 같았다. (나에만 국한된 일이지만) 그만큼 사용된 단어들은 사상가답지 않게 쉬운 편이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인지 도대체가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 챕터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분해하고 재조립해 이해하고 있다. 역시 훨씬 이해가 잘된다. 역시 원서를 읽거나 내가 별도로 이렇게 교열을 해가며 봐야하는 것일지도.. 나 역시 원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듣고 배워 알기에 원망할 자격은 없으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외국어를 열공해서 원서를 읽자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워낙 도판이 별로 없는 책이라 포스팅에 업로드할 사진도 마땅찮다. 후반부에 가면 '문자'와 '이미지'에 관련된 마그리트의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이 역시 글로만.. 책을 읽으며 일일히 찾아보는 것은 참 불편하다. 이런 책을 1만2000원에 팔고 있다니. 물질적으로 보면 화가나지만 이 번역본이라도 내가 쉬이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감사하다. 나는 언제쯤 이런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싶다. 으아아아아ㅏ 기승전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