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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jenko Stancic



크로아티아의 예술가 Miljenko Stancic의 작품.


스플리트에서의 마지막 날, 그 좁은 올드 타운을 돌고 돌다가 마지막이니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들어간 미술관. 여러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Mijenko Stancic의 작품이다.


무거운 짐가방에 더위에 지쳐 들어간 미술관에서 깊게 감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해서 보며 슥슥 둘러보다가 마지막 즈음에 이 이미지의 톤과 분위기가 좋아 한참을 바라봤다. 갓 태어난 동생을 마주하는 아빠와 아이처럼 보였다. 유난히 따뜻한 색감 속의 인물들은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분명 한껏 경이로운 표정일거야 라고 생각하며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도 확인했다.


<Dead Child>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고, 두 번째는 나의 인식을 의심했다. 세 번째로는 나의 선입견을 돌아봤다. 그리고나서 이미지 속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유심히 바라봤고,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의 표정을 보이는 그대로 직시하려 노력했다. 유난히 큰 아버지의 그림자와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죽은 아이. 이번에는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작품의 설명이 자유로운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보는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순수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전시는 무엇인지, 어떻게 관람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내가 찾아낸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어떤 선입견의 틀 속에서 감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목이 주는 위압감은 내게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프레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시각적 프레임과 언어적 프레임. 전자는 경험에 기초하고, 후자는 정보를 기반으로 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시각적인 포맷을 아버지와 큰 아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된 둘째 아이라고 판단했다. 직감적으로 '여자 아이'라고 판단한 것은 더더욱 오직 '감'에 의한 것이다. 아마 내가 꿈꿔왔던 오빠와 여동생이라는 관계 떄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각적 프레임은 나 자신의 경험과 내면적인 희망이 비춰지는 것이다. 고로 관람객 스스로의 틀을 넘어지 못한다. 


제목이나 서문으로 지칭되는 언어적 프레임은 그 자체로 정보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정보는 주로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타자가 작성해준 서문이라면 타자의 프레임까지 포함된다. 게다가 서문을 작성한 타자가 어떤 입장에서 작성했느냐에 따라 관람객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상이하다. 즉, 변수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먼저 '제목'을 보기로 한다. 제목은 작가의 의도가 온전히 개입된 것으로 작명에 도움을 받지 않았는 이상 작가의 것임이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는 'Dead Child'라고 명명됐다. '죽은 아이'는 이미지에 등장하는 세 명 중에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지만 서 있는 두 사람을 고려해봤을 때,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가 '죽은 아이'일 확률이 높다. 물론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회화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초현실 작가라면 반전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SF 급, 식스센스 급은 아니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착시처럼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이 작가는 '죽은 아이'를 보러온 어떤 두 사람의 모습을 따뜻한 톤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런 점에 미루어 개인적으로 'Untitle'을 가장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경우엔 미술관이 소장하는 수 많은 작품 중에 하나였던지라 별도의 서문이 없었다. 하지만 서문과 관련된 경우의 수도 따져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서문을 작성한 타자의 의도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는 경우. 이 경우엔 관람객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보를 제공한다. 다만 관람객의 시야가 한쪽으로만 향하며 상상의 가능성을 닫을 수 있다. 두 번째, 서문을 작성한 타자의 의도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 경우는 타자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한 후 별도의 의견이나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채 전혀 반대의 의도를 펼쳐나갈 수 없으므로 타자가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음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엔 한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기에 관람객에게 작품을 관람하는 차선택도 줄 수 있다. 하지만 관람객이 관람에 미숙한 경우나 타자의 서문이 연관 짓기 어려울 정도로 동떨어져 있다면 설득력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론 작가의 의도를 배제하고 완전히 독립된 위치의 타자로 작성한 서문이다. 이때는 타자가 작성한 서문은 또 다른 관람객의 의견이 된다. 즉 타자는 작가와 관계를 맺지 않은 일반 관람객과 동일한 위치에 선다는 뜻이다. 고로 관람객이 읽는 서문은 또 다른 관람객의 사견에 불과해진다. 하지만 이때의 문제는 서문이라는 특성이 갖는 '작품 이해'에 객관적인 도움, 적극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장점이 있다면 관람객들은 쉬이 알 수 없는 또 다른 관람객의 의견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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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작품을 감상하고 약 30분 넘게 그 앞에 서서 생각한 이미지와 제목의 관계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에 다소 두서 없이 적은 메모였기에 아무래도 다시 생각하고 글을 수정해야 하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지. 나란 여자 교정과 교열이 제일 힘드니까. 정리를 하며 한국에서 읽었던 '죄수의 딜레마'가 생각났다. 폰 노이만의 게임 이론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다.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대 미술에서 때때로 이전의 예술 작품에서 작품과 내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게임과 달리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표면에서 플레이를 하는 느낌이랄까. 제목과 이미지는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아닐까 싶다.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각각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와 심리가 가장 재미있다. 아무튼 가장 슬펐던 여행지 스플리트에서 나는 새로운 열쇠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